우리의 근원
오늘도 차가운 방 안에 홀로 앉아 문득 거울을 보셨나요? 그 거울 속 당신의 눈빛에서 어쩌면 저 깊은 곳에 그림자를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삶의 끝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걸까요? 아니면 모든 고통을 넘어서는 영원한 안식이 우리를 기다리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 즉 죽음 이후 의식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녹여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삶의 가장 큰 수수께끼, 바로 죽음입니다. 젊은 날에는 멀게 느껴지던 그것이 세월의 강물이 흘러 어느덧 발끝에 와 있음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곤 합니다. 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측을 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죽음과 동시에 영원히 밝은 하늘로 올라가 극락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긴 고통의 끝이자 영원한 안식으로의 문턱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생전의 업보에 따라 끝없는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고 영혼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라는 의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 쌓아왔던 모든 기억,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면 지금 이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이 물음은 홀로 남겨진 당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이자 혼란이며 어쩌면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의 근원일지도 모릅니다.
한밤중에 잠 못 이르고 깨어나 문득 창밖을 바라볼 때 이 막막한 질문이 우리를 찾아와 흔듭니다. 삶의 마지막 문턱에 다가섰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많은 생사의 비밀을 밝혀 주셨지만 정작 우리가 마지막 순간과 대면할 때면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병든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간절히 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문제에 대해 과연 어떻게 답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 수천 년 전의 지혜로 함께 돌아가 부처님과 사리불 존자가 나누었던 그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리불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의문을 안고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 죽고 난 후에 의식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외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외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가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부처님의 대답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대한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삶의 진실을 밝혀주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끄는 길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죽음 이후의 세계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삶을 어떻게 거쳐가야 할지, 어떻게 외로움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때는 봄과 여름 사이의 어느 날 저녁 왕사성 밖에 있던 고요한 죽림정사였습니다. 뜨거운 낮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대숲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왔습니다. 저녁 햇살은 땅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사찰은 깊은 평화와 고요한 기운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좌에 단정히 앉아 계셨습니다. 소박한 가사를 걸치신 그분의 얼굴과 깊고 평온한 눈빛은 마치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모든 것을 품어온 고요한 산과 같으셨습니다. 그 앞에는 1,250명의 큰 비구들과 수많은 보살, 남녀 신도들, 그리고 심지어 하늘의 신들까지 모두 법문을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모든 이의 얼굴에는 경건함과 깊은 집중력이 깃들어 있었죠.
많은 제자 가운데 사리불 존자가 가장 앞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도 지혜 제일이라 불리며 날카로운 생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한 줄기 빛을 간절히 찾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방금 무상함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신 참이었고 대중 안에는 깊은 성찰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삶의 덧없음과 연약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마음 속에 스며들곤 합니다. 외로움은 종종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합니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내가 사라진 후에는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슬픔과, 나는 과연 어디로 가게 될까 하는 막막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처럼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끝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의미, 삶의 가치,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리불 존자 또한 이러한 고뇌를 깊이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 속에는 모든 중생의 깊은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리불 존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깊이 절을 올린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저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저를 괴롭힙니다. 이 문제는 이 세상 수많은 중생을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질문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평화를 앗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롭게 눈을 뜨시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리불에게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주셨습니다.
– 세존이시여, 제가 세상의 생사 현상을 관찰하다가 지극히 혼란스러운 문제와 맞닥뜨렸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에 그의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호흡은 완전히 끊기며 심장도 더는 뛰지 않습니다. 모든 생의 징후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죽고 나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가졌던 의식, 즉 그의 생각, 기억, 감정의 모든 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온기가 사라지고 눈빛에서 생명의 빛이 꺼지는 순간 그들의 존재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는 것인지 저는 알 길이 없어 답답합니다.
사리불의 목소리가 고요한 대숲에 울려 퍼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사리불의 질문이 바로 자신들의 질문임을 알았습니다. 사리불은 계속 말했습니다.
– 제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임종시의 정신이 매우 또렷하여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그 생각하고 느낄 수 있던 의식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타오르든 촛불이 바람 한 점에 꺼지듯 그 생생했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혼수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마치 깊은 잠에 빠져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에 육체를 떠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른 죽음의 방식들을 보며 의식이 정말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도 남아 있는 것인지 이 제자는 한없이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유가족들은 돌아가신 가족을 꿈에서 만났다고 하거나 심지어 고인이 꿈에 나타나 어떤 소식을 전했다고도 말합니다. 이별의 슬픔 속에서 그런 꿈들은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위독한 순간에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 자기를 데리러 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만나는 이러한 신비로운 현상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만약 의식이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다면 이 모든 현상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사리불의 질문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아난 존자도 고개를 끄덕였고 목갈라나 존자 역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사리불과 다르지 않은 진지한 고민이 엿보였습니다. 사리불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더욱 더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사후 세계에 대해 완전히 다른 묘사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죽은 뒤 생전의 행위에 따라 하늘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고 하고 어떤 이는 죽은 뒤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음은 완전한 무라고 주장합니다. 이 다른 주장들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진실입니까? 의식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의식은 과연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죽음 이후에 그 의식이 진정으로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하면 외로움에 지친 마음은 결코 평화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질문을 마치자 죽림정사 전체는 고요함에 휩싸였습니다. 이 질문은 사리불 개인의 의문일 뿐만 아니라 수 없는 중생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간절한 의문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대 가섭 존자 같은 큰 아라한 조차도 이 문제의 답이 모두에게 지극히 중요하다는 듯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진리를 갈구하는 간절함이 가득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조용히 사리불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에는 비할 때 없이 깊은 자비와 지혜 빛이 어려있었습니다.
– 사리불이여, 그대가 제기한 이 문제는 지극히 중요하도다. 이것은 실로 모든 중생이 깊이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이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끝을 조용히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대가 이처럼 깊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대의 지혜가 이미 생사의 핵심에 닿았음을 보여주는구나. 그대의 물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궁금증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고통 속에 방황하는 모든 중생의 목마름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들을 위해 이 생사의 비밀을 남김없이 밝혀 의식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 진정한 행방이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이 생명의 진정한 귀처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리라. 이 가르침을 통해 그대들은 더 이상 외로움에 떨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법회의 분위기는 더욱 장엄하고 숙연해졌습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부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 사리불이여, 죽음 이후 의식의 행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의식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의식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층차層差가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의식에 대해 아주 표면적인 차원에서만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그토록 혼란스러워하고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근본적인 이유다. 마치 바다의 표면만을 보고 바다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삶의 복잡함과 외로움 속에서 의식의 진정한 깊이를 미쳐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대들이 보통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로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마음의 활동을 가리킨다.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고,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홀로 앉아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되새기는 그리움, 혹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이 의식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식의 가장 표면적인 층에 불과하다. 마치 바다 표면의 파도와 같아서 바다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다. 파도가 거칠게 일어날 때는 바다 전체가 요동치는 듯 보이지만 그 밑에는 늘 고요하고 깊은 바다가 존재하듯 우리의 거친 의식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밑에는 변치 않는 의식의 근원이 있다.
아난 존자가 참지 못하고 여쭈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의식에는 더 깊은 층차層差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아는 이 생각과 감정 너머 의식이 존재한다는 뜻이 옵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보지만 그 너머에 무한한 우주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까?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눈빛으로 아난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 바로 그러하다. 아난이여, 그대의 통찰이 날카롭구나. 의식은 크게 거친 의식. 미세한 의식. 그리고 가장 미세한 의식, 세 가지 층차層差로 나눌 수 있다. 이 세가지 층차層差를 이해할 때 비로소 죽음의 진정한 의미와 의식의 영원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 그대들이 평소에 느끼는 생각의 활동은 단지 거친 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이 층의 의식은 실제로 몸이 죽으면 활동을 멈춘다. 마치 바람이 멈추면 파도가 잠잠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살아생에 겪는 모든 번뇌와 기쁨, 외로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는 이 거친 의식의 파도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몸이 늙고 병들어 기능이 쇠퇴하면 이 거친 의식의 활동 또한 점차 둔화되고 마침내 몸과 함께 소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홀로 병상에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육체의 모든 생명 활동이 멈추는 것처럼 거친 의식의 활동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낡은 집이 무너지면 그 안에 살던 사람이 더 이상 그 집에서 생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거친 의식이 멈출 때 미세한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잠들었을 때와 같다. 그는 생각할 수 없고 바깥 세상의 자극을 느낄 수 없어 마치 의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친 의식이 잠시 활동을 멈춘 것일 뿐 미세한 의식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으며 어떻게 정해진 시간에 저절로 깨어날 수 있고 어떻게 위험에 대해 본능적인 반응을 할 수 있겠는가? 깊은 잠에서도 우리의 몸은 위협을 느끼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거나 깨어나기도 한다. 이는 미세한 의식이 여전히 살아 있어 몸의 생명을 유지하고 반응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강물이 꽁꽁 얼어붙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얼음 밑에는 여전히 차가운 물이 미세하게 흐르고 있듯 이 미세한 의식은 거친 의식의 표면적인 활동이 멈춘 후에도 존재한다.
사리불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사람이 죽을 때 거친 의식은 사라지지만 미세한 의식은 계속 존재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느끼는 막막함 속에서도 어떤 미세한 존재의 감각은 남아 있다는 뜻입니까? 이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 그렇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마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는 이유이다. 거친 의식 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며 존재의 허무함 만을 남길 뿐이다. 마치 바다의 파도만 보고 파도가 사라지면 바다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미세한 의식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의 존재가 계속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거나 새로운 전환점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에도 그들의 존재가 어떤 미세한 형태로거든 남아 있다는 믿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목갈라나 존자가 그 특유의 직설적인 방식으로 여쭈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이 미세한 의식은 죽음 이후에 과연 어떻게 됩니까?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홀로 남겨진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이 간절한 물음에 부디 답을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목갈라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목갈라나여,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사람이 죽을 때 거친 의식이 점차 사라지면 미세한 의식이 드러나게 된다. 이 미세한 의식은 이미 죽은 육체를 벗어나 특수한 상태로 들어가는데 우리는 이것을 중음신中陰身, 또는 중유中有, 종요宗要라고 부른다. 이는 마치 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앙상한 나뭇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듯 하나의 생이 끝나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잠시 머무는 중간 단계이다.
– 중음신이란 무엇입니까?
부루나 존자가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했습니다.
– 중음신이란 죽음 이후부터 다음 생을 받기 전 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미세한 의식은 임시적인 몸을 갖추게 되는데 이 몸은 형체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물질적인 장애에 구애 받지 않지만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신통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들은 물질적인 벽을 통과할 수도 있고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미묘한 에너지체와 같은 것이다. 마치 꿈속의 몸이 물질적인 제약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듯 이 중음신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 중음신의 존재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업력에 의해 강하게 이끌린다는 것이다. 마치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이 중음신은 자신과 업의 인연이 맞는 환경에 이끌리게 되며,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찾아다닌다. 마치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이 항상 빛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중음신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의 인연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게 된다. 선한 업을 많이 지은 중음신은 밝고 평화로운 곳으로 이끌리고 악한 업을 지은 중음신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으로 이끌린다. 이 모든 과정은 외부의 심판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살아 생전에 지었던 마음의 씨앗 즉 업력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이치다.
사리불이 생각에 잠겨 물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사람마다 죽음 이후 중음의 상태에서 겪는 체험도 다르겠군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그는 지금 고통받고 있을까 아니면 평화롭게 있을까?’ 하고 끊임없이 궁금해 합니다. 이 또한 업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습니까?
– 바로 그러하다 사리불이여.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 업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중음신의 상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생전의 어떤 일들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 그들은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으로 다음 생의 인연을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들이 꿈을 통해 살아 있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혹은 명상 중에 돌아가신 분의 존재를 느끼는 이유다. 그들의 미세한 의식이 아직 살아 있는 이들과의 깊은 인연의 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이는 남겨진 이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다. 반면 업이 혼란스러운 사람은 중음신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고 종종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황급히 다음 생을 받을 길을 찾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환각과 악몽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마치 깊은 밤길을 홀로 걷는 사람이 작은 소리에도 놀라 두려워하듯, 혼란스러운 중음신은 끊임없이 불안과 고통에 시달린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없는 방황의 시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생전에 맑고 깨끗한 업을 쌓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인연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중음신은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머무릅니까? 홀로 남겨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방황하는 것은 아닙니까?
가섭이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 그 시간의 길고 짧은 건 사람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중음신은 가장 길어도 49일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다음 생을 받게 된다. 49일이라는 기간은 미세한 의식이 다음 귀처를 찾는 평균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업이 특별히 맑거나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아주 빨리 적합한 인연을 찾아 태어날 수도 있고 업이 몹이 혼란스러운 사람은 중음 상태에서 여러 가지 무서운 환상들을 경험하며 더 오랜 시간 방황하기도 한다. 마치 씨앗이 발아하는 시간이 각각 다르듯 업력에 따라 중음신이 다음 생을 받는 시간도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생을 받아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아난에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신 가족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홀로 남겨진 이들 중에는 사랑하는 이를 느끼지 못해 더욱 외로워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설명하셨습니다.
– 아난이여, 그것은 여러 가지 인연과 관련이 있다.
첫째는 중음신이 살아 있는 사람과 접촉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살아 있는 사람이 그 정보를 받아들일만큼 민감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며
셋째는 그 둘 사이에 충분히 강한 인연의 연결 고리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갖추어진다면 이런 바 감흥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마음의 파동이 서로에게 전달된 것,이는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인연의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육신은 사라졌어도 사랑과 인연의 끈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홀로 남겨진 이들이 비록 직접적인 접촉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과의 인연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까지 듣자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중음신의 존재와 업력에 따른 윤회는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막연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혜제일인 사리불은 분명 더 깊은 차원의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죽음 이후 의식이 죽음 상태로 들어가 다음 생을 받을 기회를 찾는다는 것은 이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 미세한 의식이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날 때 과연 어떻게 태어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왜 어떤 존재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떤 존재는 동물로 태어나며, 어떤 존재는 하늘로, 어떤 존재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까? 홀로 남겨진 이들이 나는 다음 생에 어디로 갈까 하는 불안감을 느낄 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눈빛으로 사리불을 바라보셨습니다.
– 사리불이여, 그대의 질문이 점점 더 깊어지는구나.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중음신이 태어날 곳은 전적으로 업력에 의해 결정된다. 마치 씨앗이 자신의 성질에 따라 각기 다른 식물로 자라나는 것처럼 각기 다른 업력이 중음신을 그에 상응하는 환경으로 이끌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씨앗을 심고 있다. 그 씨앗들이 자라나 열매를 맺듯 우리의 업력은 다음 생의 환경을 결정짓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이는 마치 거울이 비추는 상이 거울 자체의 의지가 아닌, 비추는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한 업 즉 선업은 선한 곳, 곧 인간의 세계나 하늘의 세계로 이끌고, 악한 업, 즉 악업은 악한 곳, 곧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로 이끈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베풀었던 자비와 사랑, 나누었던 따뜻한 마음, 혹은 지었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이 모든 것이 다음 생의 씨앗이 된다. 외로운 이에게 건낸 따뜻한 손길은 천상의 즐거움으로 이끌고, 남을 미워하고 해쳤던 마음은 고통스러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 그리고 비슷한 무게의 업력 중에서는 임종 시의 마지막 생각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들이 임종시에 마음 상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다.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롭고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다음 생을 좋은 인연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소 수행을 아주 잘했더라도 임종시에 강렬한 탐욕이나 분노 혹은 어리석은 마음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이 그가 태어날 곳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마치 평생을 쌓아 올린 탑이 마지막 순간에 작은 돌 하나 때문에 무너질 수 있듯, 임종시 한 순간 마음가짐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반대로 평소 행실이 그다지 바르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만약 임종시 진정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불,법,승 삼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낼 수 있다면 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이는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업력이 정화되고 새로운 시작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전에 꾸준히 수행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위로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한다면 결코 고통 속에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부루나 존자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게 본다면 생사윤회는 완전히 업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수행의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업력의 수레바퀴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부루나여, 수행의 의미는 바로 그 업력을 정화하고 선한 업을 쌓는데 있다. 마치 흙탕물을 맑은 물로 바꾸듯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좋은 업의 씨앗을 심는 것이 수행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윤회 과정 전체가 사실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겪는 이 생사의 바다가 사실은 깊은 꿈속의 일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중음신이 업력에 따라 태어난다고 하지만 이 과정 속에는 더 깊은 차원의 문제가 있다. 이 중음의 상태에서 떠돌아다니고 여러 세계에 태어나는 그 의식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실제하는 것인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존재는 과연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일까? 아니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외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열쇠다.
사리불은 그 순간 문제의 핵심을 깨닫고는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지금 말씀하신 그 떠돌아다니며 태어난 의식조차도 우리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존재가 사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그토록 붙잡고 있는 이 자아라는 것이 사실은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미소 지으셨습니다.
– 사리불이여, 그대의 지혜는 과연 제일이다. 지금 그대는 문제의 핵심에 닿았다. 내가 방금 말한 거친 의식, 미세한 의식, 그리고 중음의 상태에서 떠돌며 윤회하는 그 의식은 모두 망령된 의식, 즉 망식妄息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들이 비록 거친 의식보다는 더 오래 지속되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생겨나고 사라지며 변화하는 것이며 여전히 허망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마치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한 것과 같다. 외로움과 고통, 두려움의 감정들 또한 이 망령된 의식의 작용일 뿐 우리의 진정한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본질입니까?
아난이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깊은 진리를 향한 갈급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대중을 휘몰아쳤습니다.
– 모든 제자들이여,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의식의 가장 깊은 비밀이자 생명의 진정한 귀처를 밝히겠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외로운 밤을 보내는 그대들의 마음에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거친 의식과 미세한 의식의 저편에 ‘가장 미세한 의식‘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들의 진정한 본질이며,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참마음 본성이다. 이 참마음 본성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영원한 생명의 바탕이다. 홀로 남겨진 그대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이 찬란한 빛이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법회 전체가 전례 없는 고요함에 휩싸였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 궁극적인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마치 오랜 갈증 끝에 시원한 샘물을 만난듯한 기대와 경외감이 가득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속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 이 가장 미세한 의식은 앞에서 말한 그 어떤 의식과도 다르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기억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생각과 느낌과 기억의 근본 바탕이다. 마치 맑은 거울이 만물을 비출 수 있지만 거울 자체가 만물은 아닌 것과 같다. 거울은 어떤 것을 비추더라도 그 자체는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항상 맑고 투명하게 존재한다. 우리의 참마음 본성이 바로 이와 같다. 마치 허공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지만 허공 자체가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허공은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그 어떤 것도 허공을 채우거나 더럽힐 수 없다. 이 가장 미세한 의식이야말로 그대들의 참마음, 즉 본성이며 그대들의 본래의 면목 이전의 면모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는 결코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다. 외로움과 고통은 마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같아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허공 자체를 더럽히거나 손상 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 그 참마음 본성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섭 존자가 공경히 여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간절함이 가득했습니다.
– 이 참마음 본성은,
부처님께서 장엄한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생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변하지도 않는다. 선한 업을 쌓았다고 해서 늘어나지도 않고 악한 업을 지었다고 해서 줄어들지도 않는다. 우리의 선업이나 악업은 망령된 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할 뿐 참마음 본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치 그림자가 빛에 의해 생겨났다가 사라지지만 빛 그 자체는 그림자에 의해 변치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겪는 모든 생사의 변화는 단지 이 변하지 않는 본성 위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상일 뿐이다. 마치 넓고 고요한 바다 위에서 파도가 일렁이고 사라지지만, 바다 자체는 변함없이 존재하듯 우리의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은 참마음 본성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외로움이나 슬픔, 기쁨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 또한 이 바다 위를 스쳐 지나가는 파도와 같은 것이지 바다의 본질 자체를 변화 시키지 못한다.
사리불이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진실을 깨달은 감격과 함께 이제껏 자신이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경외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단 한 번도 태어나거나 죽은 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옵니까? 이는 저희에게 너무나 엄청난 진리입니다.
– 바로 그러하다. 사리불이여,
부처님께서 확고하게 답하셨습니다.
– 그대들이 생사라고 여겼던 것은 단지 망령된 생사일뿐 참마음의 생사가 아니다. 참마음은 단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으니 따라서 영원히 죽을 수도 없다. 마치 텅 빈 허공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듯 우리의 참 본성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 그대들이 윤회라고 여겼던 것은 단지 망령된 윤회일 뿐 참마음의 윤회가 아니다. 참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산과 같아서 단 한 번도 그 본래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오직 망령된 의식의 영역에서만 굴러갈 뿐 참마음은 그 윤회 밖에 늘 고요히 머물러 있다. 홀로 남겨진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도 이 망령된 의식이 만들어낸 꿈속의 감정일 뿐이다.
– 그런데 저희는 왜 이 참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이토록 위대한 진리가 우리 안에 있는데 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입니까?
목갈라나가 혼란스러운 듯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법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마음에 공명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설명하셨습니다.
–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과 같다. 꿈속에 나는 온갖 생로병사와 이별의 고통을 겪으며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 홀로 남겨진 외로움,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을 꿈속에서 나는 생생하게 경험한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그 사람 자체는 단 한 번도 침대를 떠난 적이 없으며 꿈속의 그 일들을 진정으로 겪은 적이 없다. 꿈속의 경계는 비록 생생하게 나타나지만 그 꿈은 허황된 것이다. 망령된 의식이 비록 윤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윤회는 허황한 것이다. 참마음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시종일관 자신의 본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단 한 번도 꿈속의 생사에 실제로 들어간 적이 없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꿈속의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외로움에 지친 마음들이여, 부디 이 꿈에서 깨어나라. 그러면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아난이 무언가 깨달은 듯 물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희가 의식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꿈속의 사람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군요. 꿈속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해서 꿈을 꾸는 곳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 아난이여, 아주 훌륭한 비유다. 그대들이 이 이치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의식의 진정한 행방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본래부터 있던 그 자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참마음은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니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행방이란 단지 망령된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 참마음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꿈속의 착각일 뿐이다.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것과 같다.
– 하지만 세존이시여,
부루나 존자가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 저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이 참 마음을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홀로 앉아 외로움에 잠길 때 이 참마음이 과연 저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답하셨습니다.
– 부루나여, 참 마음을 인식하는 방법은 바로 망령된 마음을 관찰하데 있다. 그대가 자신의 생각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그대는 모든 생각이 생겨났다가 머물다가 사라지는 생멸 변화의 이치를 발견할 것이다. 영원히 머무는 생각은 단 하나도 없다.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그것 자체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변치 않는 참마음 본성이다.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강물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강물을 바라보는 그대는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 더 직접적인 방법은,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 선정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의 활동이 멈추고 모든 감각이 가라앉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그것, 그 순수한 알아차림이야말로 그대들의 참마음 본성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음이 아니라, 밝고 또렷하며 분명하고 순수한 깨어있음이다. 마치 깊은 밤 모든 소음이 사라졌을 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풀벌레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것과 같다. 마음의 번뇌가 가라앉으면 그제야 비로소 참마음에 고요하고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홀로 앉아 고요히 명상할 때 그대는 이 깊은 평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리불이 감격에 차서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만약 저희가 이 참마음을 깨닫고 거기에 머물 수만 있다면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외로움도 고통도 더 이상 저희를 괴롭힐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 사리불이여, 그대의 말이 완전히 옳다. 그대가 자신의 참마음, 본성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그대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단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영원히 죽을 수도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생사란 단지 망령된 의식이 버리는 장난일 뿐 진정한 존재 상태가 아니다. 마치 배우가 연극에서 죽는 연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해탈의 문이 될 것이다. 외로움도 슬픔도 더 이상 그대들의 마음을 묶어둘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깨달은 수행자들이 임종시에 그토록 평온한 이유다. 그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허망한 연극이 끝나는 것이며 진정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마치 먼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긴 여정 끝에 자신의 고향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과 같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깊은 평화와 환희심을 느낀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자신이 죽지 않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섭 존자가 감개무량하여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벅찬 감동으로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 세존이시여, 이 진리는 너무나도 깊습니다. 제자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의식이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던 것은 마치 깨진 허공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허공은 본래 깨지지 않는 법이거늘을 어찌 깨진 곳을 찾아 헤멜 수 있겠습니까?
– 가섭이여, 아주 훌륭하다. 허공은 영원히 깨지지 않으니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참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으니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행방에 대한 모든 물음은 그저 허깨비 같은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망상일 뿐이다. 마치 꿈속의 인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 하는 것과 같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실체가 없었음을 알게 되듯 참마음을 깨달으면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난이 문득 물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희는 이제 중음신의 상태나 업력에 따른 윤회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면 저희는 단순히 참마음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 아난이여, 아직 참마음 본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수행자들에게는 중음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업력과 윤회의 법칙을 아는 것이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들이 두려움을 줄이고 죽음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물의 깊이를 알고 구명 조끼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업보의 법칙을 알면 우리는 살아 생전에 더욱 선한 삶을 살고 죽음을 더욱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윤회 과정 전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참마음 본성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려는 사람과 같다.
부처님께서 생생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 먼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비로소 깨어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생사 윤회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윤회라는 커다란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참마음 본성을 찾는 것은 바로 이 거대한 꿈에서 깨어나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을 통해 우리는 외로움의 꿈에서 깨어나 영원한 평화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 가르침은 결코 현세의 삶을 등한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삶을 더욱 의미 있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지혜의 길인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들에게 일상의 수행 속에서 어떻게 이 참마음 본성을 관찰하고 인식해야 하는지 상세히 말해 주겠다.
첫째, 그대들은 시시각각 자신의 생각을 관찰해야 한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내용에 이끌려가지 말고 그 생각 자체를 관찰하라. 마치 강 건너편을 바라보듯이 저 멀리서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대는 모든 생각이 생겨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나는 외롭다, 나는 두렵다, 나는 슬프다 하는 생각들 또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파도와 같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생멸 변화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그것, 그 자체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알아차림은 생각이 아니며 감정도 아니며 관찰될 수 있는 그 어떤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찰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마치 하늘이 구름이 일어나고 가는 것을 보지만 하늘 자체는 변하지 않듯, 그대 안의 알아차림은 모든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알지만 그 자체는 변치 않는다. 이 알아차림 속에서 그대들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대들은 홀로가 아니다. 이 알아차림의 빛이 늘 그대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대들은 선정 수행 속에서 깊이 체험해야 한다.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닦아 마음이 점점 고요해져서 거친 망상들이 쉬고 미세한 분별심마저 내려놓았을 때 그때 드러나는 순수한 깨어있음이야말로 그대들 참마음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조용한 공간에 앉아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라.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부드럽게 따라가 보라. 마음 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감정들을 판단하지 말고 그저 흐르는 물처럼 바라보라. 점차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 고요함 속에서 빛나는 순수한 알아차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참마음 본성이다. 이 고요함 속에서 그대들은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홀로 있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그대들의 마음은 가장 따뜻한 집이 될 것이다.
셋째, 일상 생활 속에서 이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때나 항상 이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알아차림의 본성에 머물러야 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 차의 향기와 온기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알아차려라. 뜰 앞을 거닐 때 발이 땅에 닿는 감각, 바람이 뺨을 스치는 감각, 새들의 지저귐을 온전히 알아차려라. 기쁨이라는 느낌은 생겼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지만, 그 기쁨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변함 없음을 알아야 한다. 괴로울 때 괴로움이란 느낌은 생겼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지만 그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변함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아 지금 외로움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 외로움에 빠져들지 마라. 외로움을 알아차리는 그 마음은 결코 외롭지 않다. 이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그대들의 모든 일상이 참마음 본성과 연결될 것이다. 그러면 홀로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오히려 깊은 평화와 충만함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넷째, 특히 임종시의 수행을 중시해야 한다. 임종의 순간은 참마음 본성을 인식할 가장 좋은 기회다. 왜냐면 이때는 거친 의식이 저절로 흩어지고 미세한 의식이 점차 드러나며 가장 미세한 알아차림의 본성이 더욱 쉽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다섯째, 평소에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길러야 한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본성으로 돌아갈 기회다. 몸의 죽음은 마치 낡은 옷 한 번을 벗는 것과 같고 의식의 변화는 마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참마음 본성은 단 한 번도 그 옷을 입은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그 어떤 방안에 머문 적이 없다. 그것은 늘 모든 것의 근원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대가 이치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죽음은 그대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해탈자가 될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새가 우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 그대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대들 안의 참마음이 영원히 그대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은 여기까지 듣고 감동의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가 풀리면서 찾아온 깊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 세존이시여, 제자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단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는 참마음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마치 집을 잃어버린 줄 알고 온 세상을 헤매지만 사실은 늘 집안에 있었던 어리석은 아이와 같았습니다. 이 진리는 저의 마음 속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단번에 녹여주었나이다.
– 사리불이여, 아주 훌륭하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 그대들이 찾아 헤매던 참마음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대들이 가야 할 곳은 바로 지금 이 자리다. 그대들이 증득해야 할 부처의 성품은 바로 그대들 본래의 모습이다.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얻고 잃음에 대한 망상을 내려놓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그 자리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다. 홀로 앉아 외로움에 잠길 때 이 진리의 말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늘 참마음이라는 고향 집에 머물러 있었으니 어디로 갈 필요도 무엇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아차릴 뿐이다.
아난이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 이 이치가 이토록 간단한데 저희는 왜 예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요? 왜 이토록 명백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헤맸을까요?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설명하셨습니다.
– 아난이여, 이치는 실로 매우 간단하다. 너무나 간단해서 그 어떤 복잡한 수행 방법도 그 어떤 신비로운 경계도 필요 없다. 지금 여기 이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그것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왔다. 사람들은 항상 진리는 복잡할 것이라 생각하고 해탈은 분명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할 것이라 생각하며, 가장 간단한 것 속에 숨겨진 가장 귀한 보물을 놓치고 만다. 마치 산 정상의 보물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자신의 발밑에 다이아몬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습관, 주관, 즉 습기가 우리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밖에서 찾게 만들고 습관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게 하며, 습관적으로 현상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마치 익숙한 길만 걷는 습관처럼 밖으로만 향하는 마음의 습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이 변하지 않고 내면에 있으며 모든 현상을 초월해 있는 참마음 본성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실로 뿌리 깊게 박힌 많은 관념과 습관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때로는 오래된 습관들이 우리를 외로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감옥의 문은 열려있다.
목갈라나가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습니다.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행의 과정이란 어떤 새로운 경지를 닦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참마음을 가리고 있는 무명과 집착을 걷어내는 것이로군요. 마치 구름이 걷히면 본래의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말입니다. 저희는 그동안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었지만 사실은 버려야 할 것들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옵니다.
– 목갈라나의 이해가 아주 정확하구나.
부처님께서 확언하셨습니다.
– 참마음 본성은 본래 완전무결하여 그 어떤 장식도 필요 없고, 본래 깨끗하여 그 어떤 정화도 필요 없으며, 본래 자유로워 그 어떤 해탈도 필요 없다. 이른바 수행이란 단지 참마음 본성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고 허깨비 같은 현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던 그 원만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며 이미 해탈되어 있다. 다만 스스로가 부처임을, 해탈되어 있음을 알지 못할 뿐이다.
법문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죽림정사의 모든 이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마음을 다해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목소리로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 모든 제자들이여, 사리불이 제기한 죽음 이후 의식의 행방에 대한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을 함께 탐구하게 하였다. 이제 그대들은 이 문제의 진정한 답이 의식이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에 있지 않고, 무엇이 죽지 않는 참마음 본성인가를 깨닫는데 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대들은 다시는 생사라는 환상에 미혹되지 말고 다시는 윤회라는 두려움에 속박되지 말라. 시시각각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 참마음 속에 머물러야 하며 매 순간 순간 순수한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유지해야 한다. 무명이라는 먹구름이 걷히면 지혜의 태양은 저절로 빛날 것이다. 망상이라는 파도가 잠잠해지면 참마음이라는 바다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기억하라. 그대들이 찾아헤매던 집은 바로 그대들의 발밑에 있다. 그대들이 증득하고자 하는 부처는 바로 그대들 자신이다. 그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저 언덕 피안은 바로 지금이 순간이다. 죽음은 종점이 아니라 돌아감, 회귀다. 윤회는 실제가 아니라 꿈이며 환상이다. 생명은 찬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 모든 외로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그대들의 마음은 영원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그대들이 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참마음 본성을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비로소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끼겠는가’ 라는 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니 잃을 것도 없는 것이다. 비로소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로서 ‘오는 바와 같이 가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궁극의 경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원하건데 그대들 모두가 이것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 시시각각 참마음을 비추어 보고 매 순간 순간 본성에 머물기를 바란다.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라.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 외로움을 알아차리는 자신을 관찰하라. 슬픔이 밀려올 때 그 슬픔을 알아차리는 자신의 마음을 놓치지 마라. 그러면 외로움과 슬픔은 그저 지나가는 구름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대들 모두가 생사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얻기를 바란다. 이 고통스러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대들 모두가 자신의 본래 면목을 깨달아 위 없는 깨달음, 즉 보리菩提Bodhi를 중득하기 바란다.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대들 안에 부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축원하노라.
법문이 끝나자 죽림정사는 깊은 고요함에 잠겼습니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결코 지지 않는 밝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의 빛이었고 참마음이 드러난 것이며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깨어있음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사리불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제자는 이 궁극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완전히 새로운 수행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외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 순간 매 걸음마다 참마음 본성의 빛과 함께하며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 의식의 진정한 행방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본래부터 있던 그 자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진정한 귀처가 저 먼 언덕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순간의 알아차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수행의 진정한 목표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알아차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읽은 분들께,
이 가르침은 죽음 이후의 세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가장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 의식의 행방에 대한 이 가르침은 마치 감로수처럼 생사의 바다에서 헤매는 수많은 중생의 마음을 적셔줍니다. 홀로 외로움에 지쳐 있는 당신의 마음에 이 감로수가 갈증을 해소해 줄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그 죽음은 허깨비이며 당신이 찾고 있는 불멸은 이미 당신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죽음은 당신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낼 기회입니다. 이 가르침은 해탈을 구하는 모든 이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벗어나고자 하는 그 윤회는 꿈속의 일이며, 당신이 증득하고자 하는 그 본성은 본래부터 당신의 것입니다. 밖에서 찾을 필요도 안에서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알아차릴 뿐입니다. 당신이 이 이치를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죽음은 당신에게 더 이상 두려운 미지의 대상이 아니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마치 먼 길을 떠났던 자녀가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듯 당신의 참마음은 영원한 안식처로 당신을 이끌 것입니다. 생명은 당신에게 더 이상 찰라에 스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영원한 드러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는 시간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수행은 당신에게 더 이상 힘겨운 추구가 아니라 본성에 편안히 머무는 자연스러움이 될 것입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의 마음은 저절로 고요하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왜냐면 궁극적인 의미에서 당신은 단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단지 무명無明이라는 거대한 꿈 속에서 자신이 떠돌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홀로 외로이 헤매는 꿈 속에서 당신은 자신을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입니다. 깨달음의 햇살이 당신의 마음을 비출 때 생사를 헤매던 기나긴 밤은 순식간에 끝나고 돌아감의 여명은 영원히 밝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 외로움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당신의 마음은 영원한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원하건데 이 법문을 접한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이 의식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부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참마음 속에 편안히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그 어떤 외로움도 당신을 침범하지 못하는 고요한 안식처에 머무십시오. 모두가 하루빨리 자신의 본래 면목을 깨달아 생사의 두려움을 완전히 뛰어넘고 궁극적이고 원만한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어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자비의 빛을 나누어 주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향 집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늘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바로 당신의 발밑에 있고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저 고요히 자신의 참마음 본성에 머무십시오. 이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이 글은 유튜브 채널 ‘인생이야기’의 ‘죽으면 의식은 어디로 갑니까?’ 영상을 텍스트화 것으로 내용 중 일부를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