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비 오는 날 목련의 낙화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질척한 땅 위에 엉겨 붙은 꽃잎. 그 봄이 가고, 계절이 바뀌도록 대문 밖 우편함이 늘 비어 있을 때, 거기 내리쬐는 무심한 햇살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집 안에서 커튼을 걷어내거나 창문을 열던 실루엣이 보이지 않고 인기척이 끊겼을 때. 그것은 분명 빈 우편함이 받아 놓은 오래된 적막에 단서가 있으리라.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 오래전부터 서 있는 굵은 참나무에서 발견한, 주머니칼로 새겨진 어떤 사랑의 맹세. 내려오던 언덕 아래 숲 그늘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발견하였을 때. 멀리 보이는 언덕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차가운 가을비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빗줄기 속에서 담배 연기 자욱한 주점 안의 트로트가 음울 거릴 때. 계단을 뛰어오르는 발소리가 옆 방으로 들어서고 낮고 속삭이는 회포의 소리로 넘어올 때. 그 빗속에서 그리운 이의 전화는 벌써 며칠째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습기 찬 다락방의 곰팡이 스는 냄새. 어쩌다 그곳을 열어보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팔 떨어진 인형, 누렇게 변색한 소설책, 퍼렇게 녹슨 동전, 어머니의 대나무 곡자. 아마도 나는 어머니의 자로 다락방의 낡은 반닫이 함 뒤를 훑어냈거나, 회초리 대용의 그것을 그 방구석에 숨겼으리라. 어머니는 그 자를 얼마나 찾으셨을까. 그 들리는 듯한 한숨과 혼잣말 소리가 지나간 세월을 슬프게 한다.
  버려진 사육장의 녹슨 창살 안에 보이는 구물구물한 개들의 눈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말라붙은 먹이, 썩어가는 발로 뒤뚱거리는 어미의 품으로 파고드는 새끼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이다. 비정한 인간들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때로 격하게 분출하는 그들의 으르렁거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필라델피아 거리’, 김수영의 시집, 멀어져간 사랑, 그 폐허의 가슴에 첫눈이 내릴 때 우리는 말간 슬픔을 느낀다. 새벽녘 빈 가게 안의 침침한 불빛 속에서 홀로 잔돈을 세는 가장의 어깨. 종방 후 TV의 지지직거리는 화면. 잠에서 깨어 그 화면을 바라보는 멍한 얼굴. 베갯잇에 얼룩진 눈물 자국.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먼 방앗간 발동기 소리.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 그것은 마을 안에 우람한 팽나무가 서 있는 고향 마을을 떠오르게 한다.
  태양이 이글거리고 검은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신기루처럼 피어오를 때, 떼 지어 바다로 빠져나간 텅 빈 도시 안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가끔 빈 깡통이 굴러다닐 때, 당신은 비어 있는 옆 동료의 일 처리에 밤늦도록 묻혀야 한다.
  안톤 슈낙의 글처럼 정말로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낮에는 기적 소리로 달아나고, 밤에는 차창 안의 불빛으로 달아난다. 기차가 지나간 낡은 건물 창문에 오래도록 비친 실루엣은 까닭 없이 쓸쓸하다. 밤 비 속에서 간간이 고인 물웅덩이 위로 가로등의 불빛이 반사될 때.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가 그 비에 젖었을 때, 당신은 까닭 모를 우수를 느낄 것이다.
  수화기가 잘못 놓아진 전화기의 삐 삐 거리는 경고음. 수화기를 바르게 내려놓고 돌아서자 울리는 벨 소리, 손이 가는 순간 멈추는 벨.
  가을의 갈대 밭. 청둥오리나 기러기 떼의 무수한 울음소리.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들 뿐 이랴.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 구부정하게 밀려가는 보행기. 매듭 고리가 끊어진 시곗줄, 삐거덕거리는 그네. 이끼 낀 돌탑, 잿빛과 보랏빛, 분분한 낙화. 털이 빠진 늙은 개, 아무도 없는 임도, 덜렁거리는 이정표. 냉기 가득한 방, 쪽방 사람들. 마지막 전철, 반대편으로 넘어간 급제동 자국과 하얀 스프레이 표시. 오후 5시쯤. 도시의 불빛. 저녁에 오는 첫눈, 조용하게 그러나 끝도 없이 내리는 비. 말라버린 우물. 첫사랑의 파편. 이 모든 것이 또한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이 글은 안톤 슈낙의 동명 타이틀의 수필을 모방한 것이다. 너무 좋은 것들은 ‘나도 한번?’ 이라는 욕심을 부리게 한다. 습작의 사소한 기쁨이다.  스타일은 흉내냈지만 정서는 내 안의 것이다.  

 

Horizon

댓글달기

By Horizon

최신 댓글

보여줄 댓글이 없습니다.